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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들이 한글을 배우는 것은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일" - '세계평생교육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는 박영도 수원제일평생학교장
  • 기사등록 2017-10-24 09: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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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도 수원제일평생학교장
[시사인경제] “술만 마시면 글 모른다고 구박하며 주정하는 남편 눈치에 하루에도 몇 집을 다니며 평생을 도배장이로 살았다. …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까막눈 할머니가 지금은 제일 행복하다.”

수원제일평생학교(수원 매교동) 박영도(58) 교장의 사무실 소파에는 비뚤배뚤한 글씨로 쓴 ‘소감문’이 쌓여있었다. 제일 위에 놓여있는 소감문은 71살에 제일평생학교에서 한글 공부를 시작한 어르신이 쓴 것이었다. 박 교장은 “어르신들이 한글을 익히고 나서 쓰신 소감문들”이라며 “어느 하나 감동적이지 않은 글이 없다”고 말했다.

오는 26일 ‘세계평생교육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는 박 교장은 ‘야학(夜學)의 산증인’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야학교사로 활동하며 수많은 이들에게 ‘깨우침의 기쁨’을 선사했다. 제자가 3500여 명에 이른다.

박 교장은 “저보다 훌륭하신 분이 많은데, 이렇게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게 돼 영광스러우면서도 쑥스럽다”며 “교육에서 소외되는 이들이 없도록 더욱 노력하겠다”고 입성 소감을 밝혔다. 이어 “수원시민이라는 것이 자랑스럽다”고 덧붙였다.

박 교장이 ‘야학’을 처음 접한 건 대학 2학년 때인 1979년이었다. 선배가 “나랑 어디 좀 같이 가자”고 해서 무심코 따라갔는데, 그곳이 야학이었다.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노력하는 청소년들, 열정적으로 가르치던 야학 교사들의 모습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군 전역 후 1983년 복학했는데, 학교 게시판에서 ‘야학교사 모집’이라고 적힌 작은 공고를 봤다. 그날 저녁 학교(대구 효목성실고등공민학교)를 찾아갔고, 야학 교사가 됐다. 박 교장과 ‘야학’의 긴 인연이 시작된 날이었다.

“저는 시골(구미 선산읍)의 가난하지도 풍족하지도 않은 농가에서 태어났어요. 주변에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중에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자’고 다짐했죠. 야학은 제 꿈을 실천할 기회였어요. 학생들을 가르치는 게 적성에도 맞았어요.”

대학 생활 내내 야학교사로 활동하다가 1988년 서울에 있는 회사에 취업하면서 야학교사도 그만두게 됐다. 하지만 야학과 인연은 서울에서도 이어졌다. 야학교사였던 직장 옆자리 동료가 “서울 YMCA 부설 야학에서 교사를 하는 게 어떠냐?”고 권했고, 박 교장은 흔쾌히 수락했다.

1991년 오산에 있는 회사로 직장을 옮기면서 또 한 번 야학교사 활동을 중단할 위기에 처했다. 박 교장은 퇴근하자마자 기차와 전철을 갈아타며 서울 덕수궁 근처에 있는 YMCA 부설 야학으로 향했다. 야학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밤 11시가 넘었다. 오산과 서울을 오가는 생활을 1년 정도 하다가 더는 시간을 낼 수 없어 야학교사를 그만뒀다. 아쉬움이 가득했다.

그렇게 인연이 끝난 줄 알았던 야학은 운명처럼 다시 다가왔다. 1994년 11월 어느 날 수원역 근처를 지나가다가 전봇대에 붙어있던 야학 모집 공고를 발견한 것이다. 수원제일야간학교(지금의 수원제일평생학교)에서 낸 공고였다.

이듬해 1월부터 또 야학 학생들을 가르쳤다. 위기도 있었다. 1995년 9월 당시 학교로 사용하던 건물에 불이 나 순식간에 학교가 사라진 것이다. 이후 고등동성당 지하 교리실 등을 전전하며 어렵게 명맥을 이어갔다.

교사와 졸업생·재학생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으고, 일일 찻집을 열어 어렵게 500만 원을 마련했다. 이 돈으로 수원 평동에 있는 개척교회의 한 층을 빌려 다시 학교 문을 열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이 겹치면서 교사들이 하나둘 떠났고, 박 교장이 교장을 맡게 됐다. 그의 나이 36살 되던 해였다.

그는 “어려움이 많았지만 힘들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면서 “내가 열심히 하고 있는 일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고 말했다.

시대가 바뀌면서 야학에 참여하는 학생 연령대도 달라졌다. 1980년대에는 돈이 없어 정규학교에 못 가는 청소년들이 대부분이었고, 90년대에는 ‘근로 청소년’들이 많았다. 2000년 이후로는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했던 60∼70대 어르신들이 야학을 많이 찾는다.

“한글을 몰라 잘못한 것도 없이 평생을 ‘죄인’처럼 살던 어르신들이 제일평생학교에서 한글을 깨우치고 행복해하시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벅차요. 남편, 자식한테 한글 배우는 걸 비밀로 한다고 하시는 어르신들에게 항상 ‘한글 공부는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일이고, 존경받고 칭찬받을 일’이라고 말씀드려요.”

박 교장은 “어머니한테 ‘지금까지 글 모르고도 잘 살아왔는데, 그 나이에 배워서 뭐 하느냐?’고 하는 자녀들도 있다”면서 “‘엄마는 몰라도 된다’는 생각은 버리고, 부모님이 더 많이 공부할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수원제일평생학교에서는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하는 문해(文解) 교육, 검정고시 과정, 학교 밖 청소년들을 위한 대안 교육, 다문화 주민들을 위한 교육 등을 하고 있다. 학생 대부분이 ‘사회적 약자’다.

박 교장은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이 교육에서만큼은 배제되지 않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면서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배움의 기회를 선물하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1963년 개교한 수원제일평생학교는 2011년부터 수원 매교동의 한 오래된 건물 3층에 자리를 잡고 있다. 건물이 좁은 골목 안에 있어서 어르신들이 대중교통으로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 엘리베이터가 없어 어르신들은 3층까지 걸어 올라와야 한다.

“어르신들이 학교를 찾아오기도 어렵고, 3층까지 걸어 올라오시는 것도 큰일이에요. 비어있는 공공건물을 쓸 수 있도록 (수원시에서) 좀 더 배려해주시면 어르신들이 훨씬 나은 환경에서 공부하실 수 있을 거예요.”

박 교장은 “수원제일평생학교도 언젠가는 시대적 소명을 다하는 날이 올 것”이라며 “그날까지 최선을 다해 소외계층을 위해 일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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